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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지”의 <Imagine>, 뉴토피아를 꿈꾼다




노동자들이 빠져 나간 구로동은 어두웠고, 손님을 기다리는 네온사인의 번쩍임은 당황스러웠다. “꽃다지”의 스튜디오가 있는 구로공단은 축 늘어진 채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는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스튜디오의 문을 여는 순간, 밝은 기운이 느껴졌다.


 깔끔하게 정돈된 작은 스튜디오 벽면에는 18년을 이어온 노래패답게 팬클럽 게시판이 걸려 있었다. 조명도 없이 거리에서 노래하는 가수를 엄마로 둔 3살 아이는 오늘도 세상을 바꿔 줄 로봇을 기다리며 스튜디오 한켠에서 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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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에서만 보던 이태수, 조성일, 정혜윤. 그들은 노래로 연대하는 “꽃다지”다. 들이나 밭의 양지바른 곳에 핀다는 꽃, 꽃다지. 꽃말은 무관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꽃다지”는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꽃사람’들과 함께 해도 들지 않는 지하에서 20년을 해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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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이들의 눈물을 자아낸 <전화카드 한 장>, 많은 이들을 춤추게 한 <바위처럼>, 그리고 많은 이들이 안치환의 노래로 알고 있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까지. 사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는 1997년 변화가 시작된 운동판에 대중가요의 감성을 불어넣은 “꽃다지”의 노래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오히려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MR 반주의 노래보다는 실제 라이브콘서트를 펼치려 애쓰고 있는 “꽃다지”는 <단결 투쟁가>나 <민들레처럼> 같이 전투적이고 서정적이었던 히트곡에 머무르지 않고, 록을 포함한 다양한 장르로 음악적 확장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2008년 촛불 이후 운동권과 노동권이 아닌 일반 대중을 상대로 무대에 서는 일이 잦아지면서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온 과거 운동권 386세대들에게는 소주 한 잔과 같은 향수를, 신세대들에게는 대중가요 외에 다른 음악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요즘은 자신들의 스튜디오가 위치한 구로 지역 아동들을 돕기 위해 구로역에서 격주 월요일마다 공연을 하고 있다. 역시 조명 없이 무대 없이 거리에서 하는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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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을 준비면서도 또 사전에 전화로 출연 섭외를 하면서도 “꽃다지”가 운동권 노래가 아닌 다른 노래를 부르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노래 요청에 “꽃다지”는 존 레넌의 <Imagine>을 불렀고,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꽃다지”의 <Imagine>은 참 밝았다. 2008년 광화문에서, 2009년 용산에서 보던 모습이 아니었다.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모습이, 그리고 노래를 듣는 우리의 모습이 평화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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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는 2008년 12월 23일 자 한겨레 칼럼을 통해 지금 대한민국에서 <Imagine>을 다시 들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따뜻한 느낌과 달리, <이매진>은 음악사상 유례없는 급진적 메시지의 선언문이다. 여기서 레넌은 종교, 계급, 국가, 사유재산 따위가 없는, 온전히 사람이 중심 되는 평화로운 세상을 제안했다. 스스로 ‘뉴토피아’라 이름 붙인 신세계였다. 그것은 흔해 빠진 정치 선전이 아니라 휴머니즘에 뿌리박은 호소였다. 음악전문지 <롤링스톤>이 <이매진>을 “대중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들” 가운데 세 번째 순위로 꼽고, “우리가 극심한 비탄을 버텨낼 수 있도록 도와준 영원한 위로와 약속의 송가”라고 상찬해마지 않은 근거도 거기 있다고 할 것이다.

(중략) 

 출범 1년 만에 돈과 계급과 종교의 잣대로 이 나라를 동강내버린 지금 정권 앞에서 <이매진>을 다시 들어야 할 이유,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선생님을 빼앗긴 아이들에게 거듭 들려줘야 할 이유와 다름 아니다.


 그리고 <붉고도 우아한 문화토크>를 세 번째 진행하고 있는 변영주 감독이 세 번째 또 이렇게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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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추악한 정치사찰 이겨낸 ‘뉴토피아 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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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경제평론가)








삼성에 대한 생물학적 고찰 


- 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서평 



공생과 기생 

“생물학적 고찰”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을 붙였지만 실은 고작해야 생물학적 비유라고 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전공자는 물론, 세심한 관찰력을 가진 일반인에 비해서도 그다지 많은 지식이나 감수성을 갖지 못한 내가 감히 생물학을 동원한 것은 김용철 변호사의 책을 읽고 딱 떠오른 낱말이 ‘공생’과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개미와 진딧물 간의 관계로 배운 공생(symbiosis)은 진화론 쪽에서도 흥미로운 주제이다. 흔히 ‘생존 경쟁’이라는 어구로 거칠게 요약되기 일쑤인 진화론의 삭막한 풍경에서 공생의 협력은 아름다워 보일 정도이다. 하버드 대학의 트리버스(Trivers, R.)가 “상호적 이타성의 진화”라는 유명한 논문(1971)에서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도 기실 자신의 포괄적 적합성(inclusive fitness)을 높이기 위한 행위, 즉 ‘상호적 이타성(reciprocal altruism)에 불과하며 결국 고전적 자연 선택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찬물을 끼얹긴 했지만 말이다. 이에 대해 심리학이나 인류학, 그리고 최근에는 행동경제학까지 가세해서 문화적 유전의 공진화를 통한 집단선택을 내세워 양 쪽의 주장이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지만 다윈 이래의 정통 생물학은 요지부동인 듯 하다. 

40대 중반 이상이라면 어렸을 적 배앓이의 주범 중 하나였던 회충을 바로 연상할 수 있는 기생(parasitism) 역시 공생의 한 종류이다. 다만 트리버스의 ‘상호적 이타성’, 더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면 주인(개미)과 손님(진딧물)이 모두 이익을 보는 공생(mutualism, 상리공생)과 달리, 기생이란 손님(기생충)은 이익을 보지만 주인은 손해를 본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이 외에도 죽은 소라 껍데기에 사는 소라게의 경우처럼 손님은 이익을 보고 주인은 이익도, 손해도 없는 일방 이익 공생(commensalim, 편리공생)이 있다.  

김용철 변호사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생생하게 밝힌 삼성과 검찰의 관계는 어떤 공생일까? 주인(삼성)과 손님(검찰)이 모두 이익을 본다. 삼성은 스스로 상당한 비용을 들여(뇌물, 접대, 정보와 논리 제공) ‘수사비도 없는 가난한’ 검사를 돕는 아름다운 이타적 행위를 했지만 결국 삼성의 생존 가능성(포괄적 적합성)을 높이는 ‘상호적 이타성’을 발휘한 것이다. 검찰 쪽은 쩨쩨하게 몇푼(?) 받거나 공짜 골프를 친 데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의 포괄적 적합성, 즉 승승장구의 가능성이나 훗날 변호사 수입을 꽤나 높인 게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 

김용철 변호사는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돌연변이(mutant)에 속한다. 만일 이런 돌연변이 전략이 성공해서 김용철 변호사와 같은 사람이 늘어난다면 삼성은 새로운 진화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책의 첫머리 40페이지 정도는 그가 왜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을 찾게 되었는지에 관한 절박한 기록이다. 그의 돌연변이 행동은 수 십년 맺어온 익숙한 인간관계의 단절, 그리고 변호사로서의 밥줄마저 위협받는 결과를 낳았다. 

외부의 침입자(intruder)도 삼성을 위협할 수 있다. 검찰은 강력한 외부 침입자가 될 수 있다. 재벌 총수가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이 검찰 조사라니 삼성은 총력을 기울여 그런 상황을 막아야 한다. 검사가 중요한 로비 대상이 되는 이유다. 더구나 삼성은 또 다른 잠재적 외부 침입자인 정부와 청와대에도 상리공생의 관계를 만들어 놓았으니(뒤에 기술) 같은 공무원으로서 더 넓은 공생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는 것이 여러 모로 편안한 상황이 된다. 심지어 “삼성 장학생의 대상이 되지 못하면 무능한 검사”라는 전도된 기준까지 생길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하랴. 

만일 삼성의 제안을 거부하고 나아가서 구체적으로 침입 행동을 한다면 삼성은 이를 강력하게 응징한다. 최근 검찰의 향응을 폭로한 정아무개씨에게 부산지검장이 “김용철 꼴이 날 줄 알라”고 협박한 것은 이런 응징의 효과를 방증한다. 돌연변이나 침입자에 대한 응징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현실에서 입증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이제 공생관계는 생존의 필수조건이 된다. 심지어 삼성과 구체적인 소통이 전혀 없는 중립적 인사라 해도 삼성에게 침입자로 분류되는 행위를 웬만해선 하기 어렵다. 예컨대 삼성에 유리한 법리와 불리한 법리가 50:50이라면 보통 판사는 유리한 쪽을 택하게 될 것이다. 삼성에 유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들 대부분이 이런 부류라고, 즉 20:80인데도 삼성 무죄의 판결을 내린 것은 아니라고 내심 우격다짐하는 것은 오로지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이다.  

어디 사법부 뿐인가? 최근 경향신문이 용감하게(ㅠㅠ) 고백했듯 삼성의 광고는 진보언론마저 뒤흔든다. 조중동에게 광고를 몰아 주고 삼성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언론에는 기존 광고를 끊어서 응징한다. 일부 인터넷 언론처럼 원래 삼성광고를 안 실었다면 또 모르지만 보통 때 삼성 광고의 비율이 10%만 되도 그 광고가 끊기는 순간 진보 언론은 생존의 위협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방송은 더 말할 것도 없으니 우리 언론 전체가 적극적 공생관계, 아니면 소극적 공생관계, 최소한 울며 겨자먹기식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생물학 용어를 또 한번 빌리자면 한국에서 삼성은 아주 높은 ‘진화적 안정성’을 획득한 상태이다. 


참여정부와 삼성의 공생  


김용철 변호사의 책이 나온 후 반짝 화제가 된 것은 참여정부와의 관계였다. ‘역시 그랬구나’ 식의 서평에 비서관 출신 인사가 사실이 아니라며 반발했고 또 다른 반박이 뒤를 이었다. “황해문화”가 재벌을 전공하지 않은 나에게 원고를 청한 것 역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식의 고백을 바란 것인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약 2년 간의 비서관 재직 중에 재벌문제를 직접 다룰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마지막 3개월(국민경제비서관) 뿐이었으니 내 얘기 역시 이정우 당시 정책실장(후반부에는 정책기획위원장 겸 경제특보)을 보좌한 간접 경험일 뿐이다. 

실로 참여정부는 재벌들에게 강력한 외부 침입자로 여겨졌을 것이다. 대통령의 인생 역정이나 스타일에 비춰봐도 그렇고 일부 개혁성향의 학자들이 초기에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정우교수는 김용철 변호사의 주장이 “참여정부라는 이름을 삼성이 지었다는 것 빼곤 전부 사실”이라고 시원스럽게 인정했다(칼라티비 jinbocolor.tv 인터뷰). 
물론 참여정부의 정책기조를 삼성이 정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예컨대 삼성의 머리에서 3대 국정목표였던 동북아구상, 국가균형발전이라든가, 참여민주주의가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각 구상에 삼성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끼워 넣었던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역내 협력이 기본이었던 동북아구상에 재경부의 경제자유구역 등 경쟁 중심의 프로젝트를 끼워 넣는다거나 국가균형발전의 이론적 기초를 세우는 데 삼성의 클러스터 연구가 일부 참조된 정도라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 그리 호들갑을 떨 이유도 별로 없다. 

인수위원회의 11개 주제를 삼성경제연구소에 똑같이 의뢰해서 양 쪽의 보고서를 비교했다는 얘기도 당시에 들었고 국가의 체통을 스스로 낮춘다는 생각은 했지만, 적어도 경제1분과에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각 분야의 삼성보고서가 훨씬 더 뛰어나리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더구나 재벌개혁의 정책기조를 건드리는 것은 제 아무리 삼성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물론 김진표 당시 인수위 부위원장이 어떻게든 재벌 개혁기조를 누그러뜨리려는 발언을 간간히 했고 후일 실제 정책 집행에서는 지지부진했지만). 어쨌든 초기에는 대통령이 국정상황실(국민의 정부 때 민간의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초대 실장은 이광재 비서관이 맡았다)의 보고서를 통해 삼성의 의견을 수시로 접했다고 하더라도 양쪽의 의견을 종합해서 판단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청와대의 실무국장부터 경제분야 비서관 대부분을 채우고 있던 재경부의 위력은   ‘2만 달러론’부터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이후 의료 민영화(경영지원회사의 설립과 채권 발행), 종합부동산세 완화, 한미 FTA에 이르기까지 후반기에는 확연하게 시장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조가 바뀌었다. 

삼성이 이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삼성과 재경부의 관계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는 전문가와 기자에 따르면 재경부의 힘있는 국장은 1차 식사의 경우 부처 업무카드로 계산하지만 2차 술자리는 삼성이 따로 발행해 준 카드를 쓰거나 외상으로 남겨 두면 삼성이 알아서 처리해 준다고 한다. 삼성등 재벌이 찬성하고 앞장 서주는 정책이라면 결정과 실행이 모두 수월해지고 성과도 빨리 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규제완화와 개방에 관련된 삼성의 방침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재경부 공무원이 1급 이상으로 승진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요즘 재경부의 국장이나 핵심 과장이면 중간에 옷을 벗어도 억대의 연봉을 능히 받을 수 있는데 특별히 삼성과 모난 관계라면 평범한 삶을 누리기에도  껄끄러운 일이 많을지 모른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는 여기서도 성립된지 이미 오래다. 

반대로 삼성의 후계구도와 관련된 입법 사항을 막기 위해서라면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다 할지라도 자리를 걸지 않을 수 없다. 2004년 11월 이동걸 당시 금감위 부위원장은 삼성생명 상장 문제로, 그리고 이정우 당시 정책기획위원장은 2005년 6월 금산법 개정 문제로 옷을 벗었다는 게 중론이다. 그리고 2005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대연정과 한미 FTA가 추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에 들어간 386비서관이나 행정관들이 전문성도 없이 삼성에 맞서 싸우는 것은 상상의 세계에서도 불가능하다. 

삼성과 재경부의 주장에 정면으로 대립하면 조중동도 밖에서 공격을 집중하는 체제였으니 가히 재벌-재경부-조중동의 삼각 동맹이었다. 이런 상황은 딱히 노무현정부의 성격 때문이거나 대통령이 삼성의 이학수실장과 가깝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세계화 선언 이후  시장만능의 논리를 공무원이 내면화한 이후 줄곧 계속됐고 외환위기 때 IMF의 입김으로 오히려 더 강화된 것이었으니 참여정부가 특별히 더 욕을 먹는다면 그건 아마도 ‘기대의 역설’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참여정부에서도 삼성-재정부-언론-검찰-사법부로 이어지는 공생관계는 더욱 확산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삼성의 힘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으니 진화적 안정성은 더 공고해졌다. 


기생에서 포식으로


내부자의 공생관계는 종종 외부자를 차별한다. 이른바 내부자-외부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내부자 간의 비밀스러운 관계가 교육과 학벌, 인맥을 통해서 재생산되면 삼성과의 공생관계는 곧 특권계층의 탄생 및 강화로 연결된다. 

삼성(그리고 내부 공생관계)과 외부자인 국민경제의 관계는 점점 더 불균형한 공생(이번에는 삼성이 손님, 한국경제가 주인이다)으로 가고 있다. 예컨대 삼성전자의 수출이 늘고 이익이 급증해도 고용은 별로 늘지 않는다면 불균형한 공생관계이고 삼성생명이 의료민영화를 통해 건강보험제도를 파괴하는 데 이르면 이제는 기생관계가 된다. 삼성은 경제적으로 이미 대마불사(too big too fail)의 단계에 도달했다. 제대로 수사하라고 임명한  특별검사가 불법 차명 주식을 이건희 회장의 합법 재산으로 만들어 준다면 이제 삼성은 기생을 넘어 포식(predation)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생물학에서 기생과 포식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즉 국민경제를 약탈한다고 판단해도 딱히 응징할 방법이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달리 선택할 길이 없다는 점에서 국민은 삼성과 강요된 공생(obligatory symbiosis)을 하고 있다. 

물론 삼성은 영원할 수 없다. 이미 김용철변호사의 책 곳곳에서 삼성 붕괴의 징후를 찾을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의 삼성자동차나 이재용 상무의 e-삼성이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그 비용은 계열사가 떠 맡았고 승계 과정에서 저지른 범죄 혐의도, 실상을 거의 모르는 계열사 사장이 대신 뒤집어 썼다. 손실의 계열사 전가이다. 이명박 정부의 금산분리 완화로 탄생하게 될 삼성 은행은 삼성계열사에 관한 한 금융의 원리를 정반대로 적용할테니 더 넓은 범위에서 손실의 사회화가 합법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공생 관계 속에서 언론은 침묵하고 사법부는 무력하다. 결국 공생의 성공 자체가 삼성의 붕괴를 가져온다. 매-비둘기 게임에서 비둘기가 모두 잡아 먹히고 매끼리 남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과 유사한데 문제는 그것이 국민경제의 파국적 위기를 뜻한다는 데 있다. 

더구나 현재의 언론 환경 속에서 많은 국민은 “삼성이 하면 뭐가 달라도 다르다”라든가 “삼성불패” 식으로 ‘상상의 공생관계’를 맺고 있다. 삼성이 공생을 유지시키기 위해 숱하게 뿌리는 비용은 결국 삼성제품의 가격에 반영되어 국민이 치를 수 밖에 없다. 국민이 특권계층 의 공생관계에 돈을 대고 있는 셈이다. 동서고금 그 어디에도 스스로의 생존가능성, 적합도를 떨어뜨리기 위해 비용을 치르는 생물은 없다. 우리가 바로 그 생물일 수 있다고 생각해 보면 ‘상상의 공생관계’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명실공히 세계1위의 기업인 토요타가 삼성보다 훨씬 적은 공생관계 속에서도 자신의 문제를 깨닫지 못해서 당한 현재의 위기를 생각해 보면 삼성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삼성에 노조가 없는 것은 그들이 즐겨 쓰는 표현대로 “글로벌 스탠다드”가 아니다. 삼성이 진정 외국자본에 소유권이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 한다면 노조를 인정하고 노동자에게 삼성주식을 보너스로 나눠주는 것이 낫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기업을 외국자본에 넘겨줄 리 만무하며 자신의 재산과 직결되었으니 훨씬 더 열심히 일할 것이다. 황금주같은 비글로벌 스탠다드를 고안하고 제도화할 이유가 없다. 

굳이 이재용씨에게 삼성을 넘겨 주겠다는 애끓는 부정을 생물학적 견지에서 탓할 길은 없다. 혈연선택(kin selection)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진화 이론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삼성이라는 집단의 생존가능성을 높이는 게 목적이라면 미생물일지라도 능력없는(또는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직계에 모든 걸 떠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후계문제와 복잡한 출자구조를 맞바꾸자는 일각의 ‘대타협’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후계 문제 때문에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금까지 발휘한 위력에 비춰 볼 때 이재용의 승계가 성공적으로 이뤄진다 해도 삼성이 스스로 공생관계를 해체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깝다. 

예컨대 삼성반도체에서 발생한 질병 문제가 그렇다. 내가 1990년대 초에 반도체산업을 공부할 때 삼성은 전교10위 내의 여학생만 채용한다고 자랑했다. 그 똑똑한 여성들이 백혈병 등 각종질병에 걸려도 삼성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어찌 글로벌 스탠다드일까. 반도체산업의 세척 공정에 위험한 화학물질이 사용된다는 것은 학계나 업계의 상식인데 이를 부인하는 것이 지금까지 구축한 공생관계 없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김상조교수가 하는 소액주주운동은 현재의 법체계대로 주주의 관점에서 삼성의 불법을 가리는 일이며 불굴의 의지와 집요한 노력으로 알토란같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한편 최근 “삼성을 생각한다”의 광고와 관련해서 김상봉교수가 제기한 소비자 불매운동은 또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삼성의 공생관계가 국민경제에 대한 기생과 포식을 넘어 우리 사회 전체의 절멸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라면 국민은 소비자의 관점에서도 그리고 주권자 관점에서도 ‘정상적인 삼성’을 요구해야 한다. 삼성의 몰락이 닥쳐 오면 물론 국민들이 들고 일어설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너무나 큰 희생을 치러서 도저히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하나씩이라도 삼성과의 공생관계를 끊어야 한다.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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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문화에 실릴 글입니다. 계간지라 오래 걸릴테니... 언제나 처럼 책 나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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